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무 덴노 (문단 편집) === 치세 === [[고분 덴노|오오토모]]가 자결한 뒤에도 오오아마는 한동안 [[미노]]에 머무르며 전후 처리를 모두 끝낸 다음에야 아스카의 시마궁(島宮)을 거쳐 오카모토궁(岡本宮)에 들어갔다. 여기에 더해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로이 대극전(大極殿)을 지었다. 두 궁을 아울러 '아스카기요미하라궁'이라 이름붙인 것은 만년의 일이다. [[673]]년 2월 27일에 즉위식을 거행한 덴무 천황은 우노노사라라노 히메미코를 황후로 삼고, '''재위기간에 한 명의 대신도 두지 않으며 자신이 직접 정무를 살폈다'''. 또한 천황은 딸 오오쿠노 히메미코(大来皇女)를 재궁(齎宮)으로 삼아 [[아마테라스]] 여신을 모시는 [[이세 신궁]]을 관리하게 하고, 앞서 조메이 천황이 지었던 백제대사(百濟大寺)를 옮겨 다카이치노오데라(高市大寺, 고시대사)로 삼는 등 [[신토]]와 [[불교]]를 아울러 진흥시키는 정책을 펼쳤다. 덴무 천황의 여러 정책을 아래에 설명했다. 그는 국호을 '''[[일본]]'''으로 확정하고, 그간 군주의 명칭인 대왕(오오키미)을 [[천황]](덴노)으로 바꿨다. 그리고 《[[일본서기]]》를 쓰게 했다. 황자들이 성장하자 덴무 8년([[679년]]) 5월 5일에 황후와 덴무 천황 소생 4명, 선황 덴지 천황 소생의 2명과 함께 요시노노미야로 가서 6일에 그곳에서 천황과 황후는 >'''여섯 명을 한 부모를 둔 자식처럼 대우하고 자식들끼리는 서로 협력한다.''' 는, '''요시노 맹약'''을 행했다. 하지만 6명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는데, 구사카베 황자가 첫 번째, 오오쓰 황자가 다음, 가장 연장자였던 다케치 황자(高市皇子)가 세 번째로 맹세했으며 이 서열은 덴무 천황의 치세 내내 유지되었다. 덴지 천황의 소생은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덴무 천황의 소생인 구사카베는 덴지 천황의 딸 아베노 히메미코(阿閉皇女, 훗날의 [[겐메이 덴노]])와 혼인했고, 오오쓰는 야마베 황녀(山辺皇女)와 혼인했다. 덴지 천황의 소생인 가와시마 황자(河島皇子)는 덴무 천황의 딸인 하쓰세베 황녀(泊瀬部皇女)와 결혼했다. 천황과 황후는 덴무 10년(681년) 2월 25일에 [[율령]](형법과 행정법)을 정할 계획을 세웠고, 동시에 구사카베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다. 하지만 12년([[683년]]) 2월 1일부터는 오오쓰 황자에게도 조정의 일을 맡게 했다. 오오쓰 황자는 여러 가지 재능이 많다는 칭송이 있었다. 재위 14년 만인 덴무 15년([[686년]]) 5월 24일, 덴무 천황은 병을 얻었다. 불법의 영험을 빌어 쾌유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, 황후와 황태자에게 7월 15일에 정치를 위임했다. 7월 20일에는 새로운 연호가 '슈초'(朱鳥)로 정해졌다. 그 뒤로도 신불에 쾌유를 비는 것은 이어졌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, 9월 9일에 덴무 천황은 숨을 거두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